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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조단경 해설 (Explaining Yukcho-Tankyoug)

2005.09.30 16:49

xemasa 조회 수:7681

육조단경이란 ?

1. 행유품
   여기서 육조 혜능대사는 인간의 마음을 절묘하게 파지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혹시 죽을지 몰라 보호하고자 큰 스님은 깨닫지 못한 것으로 해 두지만 벌서 혜능이 그 절에 올때부터 법기를 알고 있어서 자리를 물려줌에 주저함이 없었다. 신수가 마음을 자신이 관조하는 대상으로 보았지만, 혜능은 이미 그런 낮은 차원에서 떠났다. 보리본무수라고 함이 이를 증거한다. 보리는 나무가 아니다함은 다시 말해서 관조의 대상이나 수양의 대상이 아니라 그 자체가 주체적으로 움직이는 것임을 극명하게 설파한다.  그 누구도 여기서 망설임이 없어야 하는데, 우리는 항상 두 사람으로 분리하여 자기를 보고 있음을 반성하게 만든다.  스스로 불러 일으켜 세우는 일 그것이 필요하다.  이를 발원이라 할 것이다.  운전수가 따로 있고 자동차가 따로 있는게 아니라 자동차가 이미 스스로 움직임이다.  품질이 좋은 자동차는 운전수가 신이 나는 법이고 고장이난 자동차는 아무리 운전을 잘해도 못간다.
운전수는 의식세계이고 자동차는 이와 관계없이 좋고 나쁨이 정해져 있다.
그렇다면 자동차를 수리하는 일이 과연 운전을 해서 가능할 것인지 의문을 가져야 한다. 자동차 안에 사람이 따로 없고 사람이 들어가 운전할 차가 없는 상태가 되어야 한다.  이를 혼연일치의 경계 사마디라 한다.


2.반야품
  이세멱보리하면 흡여구토각이라는 구절이 절묘하다.
불법을 탐구하는 구도자들이 빠지기 쉬운 함정은 바로 여기에 있다.
사는것이 따로 있고 공부가 따로 있는게 아니라 모두 함께 어울어져 있음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항상 따로 놀고 있다.  

손따로 발따로 그렇게 걸어 가면 걸음거리가 얼마나 불편한가 ?  불교를 종교로 만들어서 형식에 얽매게 하여 놓고 공부시간이 따로 있는 것 같이 만들어 두면 더 공부를 안하게 되기 쉽다.  그리고 세사의 인식에 매어 너무 구차스럽게 따지면서 살면 공부는 뒷전이다. 언제나 자기의 기준으로 삿되고 망녕된 것을 정해 버리니 말이다.  그럴 바에는 보기는 보되 아무런 걸림이 없이 보는 것이 중요하다.  이미 정해진 인생을 산다고 생각하지 말고 항상 새롭게 태어난 것으로 알며 살아야 그 일이 된다.   제 인식이 비뚤어져 감을 서둘러 고치는 일이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어렵기 때문이다.
언제인가 도속경계는 이일향이라 했더니 여보게 도와 속에 무슨 경계가 있냐고 꾸짖은 스님의 말씀이 생각난다.

3. 의문품
공덕이 있는가 없는가 ?  조상공덕이 있음은 그냥 보시행과 선행을 말하지만 여기서의 공덕은 차원이 다르다. 대체로 공은 마음을 안으로 돌려서 쌓아가는 것이고 덕은 바깥으로 쌓는 과정인 듯한데, 공덕은 스스로 쌓는 것이지 물질이나 독특한 방법으로 쌓는 것은 아닌 모양이다.
여기서 응용하되 물들지 않는 것이 덕이란 말이 나온다.  

언젠가 꽃은 물에 흘러가도 섞이지 않아서 아름답다는 말을 한 일이 있다.  역시 그말이 그말일 것이다.  그리고 그 앞 줄에 나오는 마음에 생각을 떠난 것이 덕이며 라는 말도 있다.  이는 생각이 앞서서 마음을 더럽히는 일과 생각에 매여서 마음을 쓰지 못하는 두가지의 경계를 담고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마음관리라고 항상 말하지만 이게 잘 안되는게 현실이다.  그래서 생각을 버리라고 말한다.  자신에게 할수 있는 가장 큰 공덕사는 뭐니뭐니해도 마음을 편하게 갖는 것인데, 그렇게 하려면 생각에 매이지 말아야 한고 어떤 생각이 앞서서는 안된다는 점이 두드러지게 강조할 만하다.
보시를 공덕으로 알면 절에 가는 것이 복덕방에 가는 것과 같다. 절에 가는 일이 공덕방에 가는 일이 되려면 마음자세가 달라져야 한다.

4. 정혜품

(1)  정과 혜는 본시 하나 :
이를 사람의 상념과 영혼의 작용에 비유해 보자.
본디 정이라고 하는 것은 영혼이 안정된 상태를 의미하므로,   혜는 올바른 상념의 상태임을 알 수가 있다. 바른 생각을 하면 영혼이 맑아지고 따라서 상념 또한 밝은 지혜로 가득 차게 되니까, 영혼과 상념은 상승작용을 하는바, 본디 하나인 두가지가 작용면에서는 따로 움직일 뿐임을 알게 된다.
그러니까 영혼이 맑아야 밝은 지혜가 솟아난다는 말도 맞는 것이고, 지혜로운 생각을 가져야 맑은 영혼을 가지게 된다는 말도 맞는 것이다.
말하자면 영혼은 본체이고 상념은 두뇌를 움직여 나타나는 작용인 것이다. 옛 선인들은 이 두가지를 가지고 많은 격론을 벌였지만 별 의미가 없는 논쟁이었다고 하겠다.  비유하자면, 불을 켜면 등불이고 불을 끄면 평범한 등인데, 등은 불을 켜기 위하여 있는 것임은 자명한 사실이다. 정에 들어간 영혼은 강한 상념에너지로 작용하므로 마치 타오르는 등불 처럼 밝은 지혜를 보일 수가 있는 것이다.

(2)  법상에 끄달림
고요히 앉아  선에 들어 가면 아무런 장애가 없이 그저 평안한 상태에 몰입하느 일이 많다.  그런데 거기에 머물러서 만족하다가 보면 더 이상의 진전이 없다.  진흙탕물이 잠시 가라앉아 잇다고 해서 진흙탕의 본질이 달라지겠는가 ?  진흙이 바닥에 가라앉아서 잠시 물(마음)이 맑아 졌다는 착각이 든다.  오히려 그런 상태를 계속하는 것은 마음의 바닥(영의식의 기저)에 심적인 업장을 쌓아 놓고 수련을 하는 것이다. 이 처럼 형식에 매어서 일시 고요함을 적정에 든 것으로 생각하고 10년이고 20년이고 수련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런 사람은 영의식의 사고가 오염되어서 인간의 평범한 도리마저 잊게 되고 결국은 괴승이나 기인으로 전락한다.  그러므로 참회기도와 선정을 착각하지 말고 정신집중과 더불어 우선적으로 마음에 담아 놓은 모든 업을 씻는 일에 힘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3) 진여의 염으로 돌아가는 법
진여는 인간영혼의 본래 자리를 말한다. 인간영혼은 나름대로의 본래 업장이 있기 마련으로서 그 범위에 매이기 쉬우니까 , 더 넓고 자유로운 진여의 염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헛공부를 하게 된다.  다시 말하면 인간 이전의 커다란 자연의 일부로서의 영적 자리매김을 스스로 할수 있게 만들어야 한다는 말이다.   대우주의 영체는 움직임도 없고 흔들리지도 않는바 그 자리가 진짜 우리가 나아가야할 자리이다.

5. 좌선품

  원돈견성문은 부동의 염을 기르는 과정이다.  여기서는 아무 것도 잡으면 안된다.  밖으로 보아 상을 떠나고 자기가 선악 경계가 없는 덕으로서 좌하면서도, 안으로는 무엇엔가 끄달리지 않는 공으로서 선정해야 한다. 그렇게 하면 자성이 부동하고 일체가 고요해진다.  본시 성품이 청정하니 구태여 청정심을 일으킴도 부질 없다.

6. 참회품

  참회란  나쁜 것을 없애고 좋은 것을 키우는 과정임을 알게 해준다.
계향에서부터 해탈지견향에 이르는 5단계는 결과적인 모양이지 결코 그러한 오분법신향의 경계가 뚜렷이 나타난다고 규정된 것은 아니다.  예를 들면 계향을 지나 정향이고 정향을 지나 혜향은 말이 안된다.  돈성하는 불자는 이를 한꺼번에 성취하고 점성하는 불자는 이를 여러번 갖추면서 견성해 간다.  그런데 여기서 참회가 강조되는 것은 다름아닌 인간의 오욕칠정 때문이다.  공부를 할 때는 이러한 변화가 일어남이 당연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참회를 게을리 하면 만사 도루묵이다.

7. 기연품

  법해
   여기서 정이 곧 부처라하는 말씀에 주목하자.
대정에 든 사람이 부처인데 순간에라도 부처가 되는 일은 우리도 겪는다.


      
법선도 강좌             1994.8.14.

  육조단경 (六祖檀經)

육조스님의 가르침을 법해 스님이 정리한 것이다.

1. 행유품 (行由品)

   身示菩提樹 心如明鏡臺 時時勤拂拭 勿使惹塵埃
   신시보리수 심여명경대 시시근불식 물사야진애
                                                                神秀
        몸이 보리수라면 마음은 밝은 거울틀일세.
        부지런히 털고 닦아서 먼지나 때가 끼지 않도록하세


언제든지 생각생각에 스스로 보아 걸림이 없으며 나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 본래 제 성품을 보아야 하느니, 하나가 참되므로서 모두가 참되는 바 모든 경계가  그냥 그대로일 때에 그냥 그대로인 그 마음이 곧 진실한 것이니, 그것이 곧 무상보리의 본성품이니라. -------------五祖 弘忍 대사


      菩提本無樹 明鏡亦非臺 本來無一物 何處惹塵埃
      보리본무수 명경역비대 본래무일물 하처야진애
                                                                慧能
      보리에는 본디 나무가 따로 없고 밝은 거울 역시 틀이 아닐세.
      본시 아무것도 없는 것인데 어디에 때가 끼고 먼지가 묻나 ?

이글을 본 5조스님은 혹여  나쁜 사람이 혜능을 시기하여 해칠가 염려하시어서 짐짓 혜능의 글을 신짝으로 문질러 지우면서  이것도 견성을 못한 글이다  하시니 대중들은 모두 그런 줄 알았다.

그날 밤 혜능은 5조스님으로부터 법을 전수 받는다.

이제 너는 육조가 되었다. 잘 지켜나가 널리 중생을 제도하고 앞으로 끊어짐이 없도록하라.
그리고 송별게송을 읊으시길 ---

         有情來下種 因地果還生 無情개無種 無性亦無生
         유정내하종 인지과환생 무정개무종 무성역무생

           뜻이 있음에 씨가 내리어 인이 있음에 과가 돌아오네.
           뜻이 없으면 씨도 없느니 성품이 없으면 태어남도 없느니라

2. 반야품 (般若品)

  선지식이여, 내가 홍인화상 처소에서 한번 듣고 그 말씀에 바로 본성을 보았기에 이 교법을 가지고 펴내려 가도록 하여서 도를 배우는 자들로 하여금 바로 보리를 깨닫게 하는 것이니, 각각 스스로 마음을 관하여 본성을 볼 것이로되 만일 스스로 깨닫지 못하거든 모름지기 최상승법(最上乘法)을 아는 대선지식을 찾아서 바른 길을 지시받도록 할 것이니라.   이 선지식이 큰 인연이 있어서 중생을 교화하여 견성하게 하느니, 모든 좋은 법이 선지식에게서 능히 발기(發起)되기 때문이니라.  그러므로 삼세제불십이부경(三世諸佛十二部經)이  사람의 성품 속에 본래 구족하건만, 능히 스스로 깨닫지 못하면 마땅히 선지식의 지시를 구하여서 깨닫도록 할지니라.  그러나 만약 스스로 깨닫는 자는 밖으로 구할 것이 없으니, 언제나 선지식을 만나야만 해탈할 수가 있다고 고집한다면 이 또한 옳지 않느니라.  어째서 그러한가 ? 알고 보면 제 마음 안에  선지식이 있어서 스스로 깨닫게 되는 것을, 삿되고 어두워 망녕된 생각으로 뒤집혀졌다면 다른 선지식이 아무리 가르쳐 주더라도 구원되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바르고 참다운 반야로 비춰 본다면 한 찰나간에 망념이 모두 없어질 것이며, 만일 자성을 알아서 한번 깨닫는다면 바로 부처의 자리에 이르게 되리라.

           ----위사군에게 한 법문 ---

佛法   在世間     不離世間却
불법이 재세간하여 불리세간각이니
離世覓菩提     恰如求兎角
이세멱보리하면 흡여구토각이니라
正見   名出世   邪見   是世間
정견은 명출세요 사견은 시세간인데
邪正   盡打覺     菩提成宛然
사정을 진타각하면 보리성완연하리라


  불법은 이 세상에 있는 것이며 세상을 떠난 깨달음이 아닌 것이니
세상을 떠나서 보리를 찾음은 토끼의 뿔을 구하는 것과 마찬가지니라.

바른 소견은 출세간의 도리요 삿된 소견은 세속적인 것이라는데
삿된 것 바른 것 모두 다 두드려 부수면 보리의 자성이 완연해지리라.



------- 법문을 마치면서 읊은 게송 중에서 발췌



3. 의문품 (疑問品)

  위사군의 의문 :   공덕(功德)이란 무엇일까 ?
  제자가 들으니 달마대사께서 처음에 양무제를 교화하실 때 양무제가 대사에게 묻기를   내가 일생에 절을 짓고 스님네를 공양하며,보시하고 재 올리기를 수없이 하였는데 이 공덕이 얼마나 됩니까 ?  하니 달마대사의 대답이  실로 아무런 공덕이 없습니다 고 하셨다 하오니 , 제자는 그 뜻을 잘 모르나이다. 원컨데 가르쳐 주십시요  

  혜능 :
  실로 아무런 공덕이 없나니 선사들의 말씀을 조금도 의심치 말라. 무제는 마음이 삿되어 바른 법을 모르면서 절을 짓고 재를 올리고 중들에게 대접하여 남는 것을 보시한 것인즉 , 이는 복을 얻기 위한 것이므로 복을 구하려는 마음으로는 공덕이 될수 없기 때문이니라.  공덕은 법신중(法身中)에 있고 복을 닦는데 있지 않느니라  
-----   성품을 보는 것이 공이요,평등하게 하는 것이 덕이니,생각생각에 걸림이 없이 항상 본심을 보는 진실한 묘용이 곧 공덕이며, 안으로 마음이 겸허하여 제 자신을 낮추는 것이 공이요,밖으로 행동이 예절을 갖추어서 남을 공경하는 것이 덕이며, 자성으로 만법을 세우는 것이 공이요,마음(本覺心)에 생각을 떠난 것이 덕이며, 언제나 자성을 떠나지 않는 것이 공이요,응용하되 물들지 않는 것이 덕이니, 만일 공덕법신을 찾으려 한다면 그 점을 알고 정진하라.  이것이 참 공덕이니라  ---------
  선지식이여, 생각과 생각에 간격이 없는 것이 공이요, 마음과 행실이 곧은 것이 덕이며,스스로 성품을 닦는 것이 공이요, 스스로 몸을 닦는 것이 덕이니,   선지식이여,   공덕은 모름지기 자성 속에서 보는 것이요, 보시와 공양으로 구해지는 것이 아니니라.  그러므로 공덕과 복덕이 다른 것이니, 무제가 진리를 알지 못함일지언정 우리 달마대사님이 잘못 말씀한 것은 아니니라  

苦口的是良藥      逆耳必是忠言
고구적시양약이요  역이필시충언이니
改過必生智慧      護短心內非賢
개과필생지혜하고  호단심내비현이니라
日用常行饒益      成道非由施錢
일용상행요익하라  성도비유시전이니라

좋은 약이 입에는 쓴 법이요,  좋은 말은 귀에 거슬리는 법이니
흠을 고치면 반드시 지혜가 솟아나고, 흉을 감추면 그 마음이 옳지않다.
언제나 넉넉하게 행하라.     도를 이룸은 돈쓰는 데 달려있지 않느니라.




4. 정혜품 ( 定慧品 )

  정혜는 본시 하나이며 마치 등과 등불의 관계와 같다  

  선지식이여,나의 이 법문은 정혜로써 근본을 삼느니라.  그런데 대중은 이를 모르고 정과 혜가 다른 것이라 하지 말라.  정과 혜는 하나이며 둘이 아니니 정은 혜의 본체요 혜는 정의 작용이니라.  곧 혜일 때에 정이 혜에 있고, 곧 정일 때에 혜가 정에 있느니 만일 이 뜻을 알면 곧 이것이 정과 혜를 함께 배우는 것이 되느니라. 도를 배우는 사람은 먼저 정이 있고나서 혜가 발한다거나 혜가 있고나서 정이 발한다고 말하며 각각 다른 것 처럼 말하지 말라.  이러한 견해를 가지는 사람은 법에 두가지의 모양 (二相)을 둠이다.  입으로는 착한 말을 하면서 마음은 착하지 않음이니, 공연히 정혜가 있다하나 그런 사람에게는 정과 혜가 같지 않은 것이며,만일 마음과 입이 함께 착하면 안과 밖이 한가지라서 정과 혜가 같은 것이 된다.
  스스로 깨달아서 닦아 나감에는 말다툼이 있을 수 없느니, 만일 앞과 뒤를 다툰다면 이는 곧 어리석은 사람과 한가지라. 승부가 끝이 없으매 도리어 잘난 체함은 아법(我法)만 늘려서 사상(四相: 아상.인상. 중생상.수자상) 을 버리지 못하게 만드니라.
  선지식이여, 정혜를 비유하자면 마치 등과 등불의 관계와 같으니라. 등불이 있으면 빛이 있고, 등불이 없으면 빛이 없느니라.  등은 이 빛의 본체요,빛은 이 등의 작용이니라.  그래서 등과 등빛은 이름이 다를지라도 본체에서는 하나인지라 정과 혜도 역시 그러한 것이니라.

  法相에만 끄달림은 곧 無情이라  

  곧은 마음으로 행하여서 모든 것에 집착하지 말것이며다. 이를 모르는 사람이 법상(法相 = 모든 사물의 겉 모습)에 집착해 가지고 일행삼매(一行三昧)를 가리켜 말하기를  가만히 앉아서 마음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라고 이르니, 그렇게 되면 곧 뜻 없는 것(無情:마른 나무나 차가워진 재)이 되어서 오히려 도를 막는 인연을 짓게 되느니라.  선지식이여, 도는 모름지기 통하여 흐르게 하는 것이거늘 이와 반대로 막히게 할까보냐 ? 마음이 무엇에도 걸리지 않으면 도가 곧 통하여 흐르느니라.  마음이 그 무엇에 걸려 있으면 이것은 스스로 옭아 맴이라. 만일 앉아서 움직이지 않음이 옳다고 한다면 저 사리불이 숲속에 가만히 앉아 있다가 유마힐에게 도리어 호된 꾸지람을 듣는 것과 마찬가지니라.   또 어떤 사람은  앉아서 고요히 마음을 관하여 움직이지 않고 일어나지 않게 하면 이것이 공이 된다 고  가르치니 이는 어두운 사람이 무엇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뒤집혀져 있음이라.  이러한 자들이 적지 않으니 상교(相敎 : 겉모양만 중시하는 가르침)에 빠짐은 크게 그릇된 것임을 알라.



  眞如의 念(생각)으로 들어가자  
  무(無)란 무엇을 없이 함이며, 염(念)이란 무엇을 생각한다는 말인가 ?
무란 두가지의 모양이 없고 모든 쓸데 없는 망상이 없는 것이며, 염이란 진여의 본성품을 생각하는 것이니 진여란 곧 염의 본체를 이르며 염은 곧 진여의 작용이라.  진여의 자성이 생각을 일으키는 것이요, 눈 귀 코 혀가 능히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진여에 성품이 있는 것이므로 생각이 일어나는 것이니라.  만일 진여가 없다면 눈과 귀며 소리와 빛이 바로 없어져 버리니라.  선지식이여, 진여의 자성에서 생각을 일으키면 육근이 비록 보고 듣고 깨닫고 알더라도 모든 경계에 물들지 않고 참 성품이 항상 자재하리니 그러므로 유마경에 이르기를 모든 법상을 능히 잘 분별하되 제일의(第一義)에서는 움직임이 없다고 하셨느니라.

5. 좌선품 (坐禪品)

  원돈견성문(圓頓見性門)에서는 좌선이 원래 마음을 잡음도 아니요,조촐함을 잡음도 아니요,또한 움직임도 아니니,만약 마음을 잡는 것이라면 마음이 원래 망녕된 것이며 - 알고 보면 마음이란 꼭두각시 (幻) 와 같은 것이라서, 잡을 데가 없으며, 만일 조촐함을 잡는다 하면 사람의 성품이 본래 조촐한 것이거늘 망념 때문에 진여가 파뭍힌 것일 뿐이다.  다만 망념만 없으면 성품이 저절로 청정한 것이거늘 마음을 일으켜서 일부러 조촐하게 한다는 것은 도리어 조촐한 망념을 내는 꼴이 되느니라.
  망념이란 처소가 없으니 (망념이란 본시 실체가 없기 때문임) 잡는 것이 곧 망념이며, 조촐하다함에 형상이 없으니 조촐한 티를 내어 공부한다 함은
오히려 조촐한 데에 얽매어서 제 본성을 막음이라.
  선지식이여, 만약 움직이지 않음을 닦으려 한다면 모든 사람을 대할 때에
시비(是非), 선악(善惡)과 과환(過患)을 보지 말지니 , 이것이 곧 자성의 움직임이 멈춤이라.
  어둔 사람은 몸은 비록 움직이지 않으나, 입을 열면 문득 남의 시비 장단과 호불호에 말이 이어지니, 이는 곧 도를 등지는 것이라.  만약 제 마음을 고집하거나 조촐함을 내세우면 이 것도 역시 도에 막히는 것이라.
  어떤 것을 좌선이라 하느냐 ?  이 법문중에 걸리고 막힘이 없어서 밖으로는 선악 경계에 마음과 생각이 일어나지 않음이 이 좌(坐)이며, 안으로는 자성을 보아 움직이지 않는 것이 이 선(禪)이니라.
  선지식이여, 무엇을 선정(禪定)이라 하는고 ?
밖으로 상(相)을  떠남이 선이요, 안으로 어지럽지 않음이 정이라. 밖으로 만일 상에 걸리면 안으로 마음이 어지럽고  밖으로 만약 상을 떠나면 마음도 따라서 어지럽지 않느니라.  본성품은 저절로 조촐하며 스스로 안정된 것이건만, 다만 경계를 보고서 경계를 생각하므로 곧 어지럽게 되느니,만일 모든 경계를 보되 마음이 어지러워지지 않는다면 이것이 참된 정이니라.
밖으로 상을 떠나면 곧 선이며 안으로 어지럽지 않으면 곧 정이라, 외선(外禪)과  내정(內定), 이것이 선정(禪定)이니라.
보살계경에서 말씀하시길     내 본성품이 원래 스스로 청정하다  하셨다.
-----   我 本性 元自淸淨




6. 참회품 ( 懺悔品 )

  이미 먼데서들 와서 이렇게 모였으니 서로 인연이 있는지라, 이제 각각 꿇어 앉으라.  먼저 자성의 오분법신향(五分法身香)을  전하고 그 다음에 무상참회를  전해 주리라.
  그 하나는 계향(戒香)이니,
제 마음 가운데 그름이 없고 악함이 없고 질투가 없으며 탐심과 진심(嗔心)이 없고, 겁해(  害)가 없는 것을 계향이라 하며,
  그 둘째는 정향(定香)이니,
모든 좋고 나쁜 경계를 보되 제 마음이 어지럽지 않음을 정향이라 하며,
  세번째는 혜향(慧香)이니,
제 마음에 걸림이 없어 항상 지혜로써 제 성품을 비춰보고 모든 악을 짓지 않으며 비록 많은 선을 닦더라도 마음에 자랑함이 없으며, 위를 공경하고 아래를 생각하며 외롭고 가난한 이를 불쌍히 여김을 혜향이라 한다.
  네번째는 해탈향(解脫香)이니,
제 마음에 반연(攀緣)이 없어서 선도 생각지 않고 악도 생각지 않으며 자유자재하여 걸림없음을 해탈향이라 하며 ,
  마지막으로 다섯번째는 해탈지견향(解脫知見香)이니 ,
제 마음에서 이미 선악(善惡)의 걸림이 없으나 공(空)에 빠져서 고요함만 지키면 옳지 않으니 모름지기 널리 배우고 많이 듣되 제 본심을 알고 부처님의 이치를 통달하며, 빛에 화(和)하고 사물에 접하되 내가 없고 남이 없어서 바로 바뀜(變易)이 없는 보리진성(菩提眞性)에 이르는 것을 해탈지견향이라 하나니,
  선지식이여, 이 향은 각기 스스로 안에서 피울 것이요, 밖에서 찾을 것이 아니니라. ---(此香은 各者內薰이요 莫向外覓이니라)
  선지식이여, 이것이 무상참회(無相懺悔)이니라.
참(懺)이란 지나간 허물을 뉘우침이니 전에 지은 나쁜짓, 예를 들자면 미련한 짓, 교만하고 허망한 짓,시기질투하는 짓 등의 죄를 모두 다 뉘우쳐서 영원히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며,
회(悔)란 이후에 오기 쉬운 허물을 조심하여 다음에 있을지 모를 나쁜 짓인 미련함과 교만함과 허망함과 그리고 시기질투 따위의 죄를 미리  깨닫고 영원히 끊어서 다시 짓지 않도록 다짐하는 것이라.
이 두가지를 합하여 참회라고 하니라.  범부들은 어리석어서 다만 지나간 허물은 뉘우칠줄 알아도 앞으로 있을 허물은 조심할줄 모르므로 지나간 죄도 없어지지 않을뿐 아니라 새로운 죄가 잇달아 생기니라.   이래 가지고야 어찌 참회라 할것이냐 ?
  선지식이여, 이미 참회를 하였으니 이제는 선지식들과 함께 사홍서원을 발하리라.
  제 마음의 수많은 중생을모두 건지오리다.  제마음의 끝없는 번뇌를 모두 끊으오리다. 제 성품의 크고 바른 법문을 모두 배우오리다.  제 성품의 높고 귀한 불도를 모두 이루오리다  
  ( 自心衆生無邊誓願度 自心煩惱無盡誓願斷 自性法文無量誓願學 自性無上
    佛道誓願成 )



7. 기연품 (機緣品)

    법해(法海)를 깨우침

법해가 어느날  곧 마음이 부처란 뜻을 가르쳐 주소서  하니,
  혜능대사가 말씀하시길,
  앞 생각이 나지 않음이 곧 마음이요. 뒷생각이 없어지지 않음이 곧 부처니라.  모든 상(相)을 이룸이 곧 마음이요, 모든 상을 떠남이 곧 부처이니 내가 이것을 다 말하자면 끝이 없다. 게송을 들으라.
-- 혜(慧)가 곧 마음이요. 정(定)이 곧 부처라.
    정과 혜가 등등(等等)하면 그 뜻이 맑으리라.
    이 법문을 깨달음은 익혀온 네 공(功)이라.
    용(用)이 따로 없는 것이니  정과 혜를 함께 닦으라 --  

    법달(法達)을 깨우침

법달이 어느날 스님을 찾아와 절을 하는데 머리가 바닥에 닿지를 않아 이렇게 물으셨다.
  머리를 숙이기 싫으면 무엇 때문에 절을 하느냐 ? 마음 속에 무언가 내세울게 하나 있는 모양인데 그렇다면 무엇을 익혀 왔느냐 ?  
  법화경을 외워서 이미 삼천 부에 달하였나이다  
이 말을 들은 스님은
  네 설사 만부를 염하여서 경 뜻을 통하였더라도 그것을 자랑으로 알지 않으면 나와 더불어 함께 갈수 있으려니와 네가 이제 그걸 자랑으로 자부한다면 도리어 죄과임을 모르는구나  
이어서 말씀하시길,
  네 이름이 법달이라 했더냐 ? 허투로 외움은 소리만 맴돌게 할뿐이니
마음을 밝혀야 보살이 된다. 네게 이제 인연이 있기 때문에 너를 위하여 말해 주노라, 다만 부처는 말이 없는 것임을 믿으면 입에서 연꽃이 피리라
법화경에 자신감이 있었으나 그 진의를 파악하지 못했던 법달은 스님에게 진의를 전해 듣고서는  어리석은 질문을 또한번 한다.
  그러면 뜻만 알면 수고스럽게 외우지 않아도 좋습니까 ?
  경에 어찌 허물이 있어서 외우지 못하게 하랴 ? 다만 막히고 트임이 사람에게 있으며, 더하고 덜함이 내게 달렸으니, 입으로 외우고 마음으로 행하면 이것이 바로 경을 굴리는 것이요, 입으로는 외우되 마음으로 행하지  않으면 이는 곧 경에게 굴려지는 것이니라.  내 게송을 들으라.
  --- 마음이 어두우면 법화에 굴리우고 마음이 밝으면 법화를 굴리나니,
      아무리 외워도 그 뜻을 모르면 경뜻이 오히려 원수(怨讐)와 같으리
      라.  생각없는 그 생각이 바른 것이요.
      생각있는 생각은 삿된 것이니,  있고 없음을 모두 따지지 않으면
      흰소 수레(白牛車?진리의 수레를 상징)를 오래 오래 타고 가리라 ---




   지통 (智通)에게 삼신사지를 주어 깨닫게 함

    청정법신은 네 성품이요, 원만보신은 네 지혜이며, 천백억화신은 네 행동이니 만일 본성품을 떠나서 따로 삼신(三身)을 말한다면 몸은 있으나 지혜가 없는 것이며, 만일 삼신에 따로 제 성품이 없음을 깨달으면 곧 사지보리(四智菩提)가 밝아지리라. 아래 게송을 들으라.
  --- 자성에 삼신을 갖췄음이여. 빛을 내어 사지(四智)를 이룸이로세.
      보고 듣는 반연을 떠나지 않고, 초연히 불지(佛地)에 오름이로다.
      내 이제 너를 위해 말해 주노니, 믿어서 다시는 헤매지 마라.
      밖으로 달리어 구하는 자의 지꺼리는 보리를 배우지 마라. ---  
지통이 다시 여쭙기를,

    사지의 뜻을 말씀해 주시겠나이까 ?
   이미 삼신을 알았다면 사지도 따라서 알터인데 무얼 또 묻는가 ? 만일 삼신을 떠나서  사지를 말한다면 이것은 지(智)는 있으되 신(身)이 없는 것이니, 지가 있다고 하면 도리어 지가 없는것이 되리라
  그리고 다음 게송을 읊으셨다.
--- 대원경지(大圓鏡智) 성품이 청정하고,
    평등성지(平等性智) 마음에 병이 없고,
    묘관찰지(妙觀察智) 보는게 공이 아니며,
    성소작지(成所作智) 원경(圓鏡)과 같음이로다.
    58과 68이 과(果)와 인(因)이 되었으나,
    말로 이름하였을 뿐 실성(실성) 없나니,
    반연하는 곳에 뜻을 만약 안두면
    끊임없이 일어나되 나가정(那伽定)에 있으리라. ---

  지상(智常)을 깨닫게 함

지상은 백봉산의 대통화상에게 법을 공부하다가 온 사람이었다.
스님은 그에게 물으셨다.
    저쪽에서 어떻게 말하더냐 ? 어디 그대로 말해 보아라
    제가 하루 저녁에는 혼자 장실에 찾아가 여쭈었습니다.
     어떤 것이 제 본심이고 본성입니까 ?
    대통화상께서는  네가 허공을 보느냐 ?  하셨습니다.
      봅니다  하였지요. 그러자,
      그러면 네가 본 허공에 모양이 있는가 ? 없는가 ? 하시기에,
     허공이 형체가 없거늘 어찌 모양이 있겠습니까 ? 했습니다.
    스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네 본성이 마치 저 허공과 같아서 어느 하나도 가히 볼수 없음을 알
      면 이는 옳게 보는 것이요, 어느 하나도 가히 알것이 없음을 알면
      이것이 참으로 아는 것이다.  청황도 장단도 있을수 없고 , 다만
      본원청정한 각체가 뚜렷하게 밝아 보이면 이것이 견성성불이며
      여래의 지견인 것이다  하셨습니다.
      그러나 저는 아직도 알지 못하여 화상께 찾아왔습니다.
대사께서 말씀하시기를,
    그분의 말이 오히려 봄(見)과 앎(知)을 따로 두었으므로,너로 하여금
    깨닫지 못하게 한 것이다. 이 게송을 보이리라
--- 한 법도 보지 않고 없다는 봄(見)을 두면
    뜬 구름이 해를 가리는 것과 같고
    한 법도 알지 않고 공(空)이라는 앎(知)을 두면
    도리어 허공에서 번개가 침과 다르쟎다.
    이러한 봄과 앎이 아직도 일어나면
    그릇된 인식이라서 방편을 어찌 알랴.
    마땅히 한 생각에 그른 것을 제가 알면
    자기의 신령한 빛이 항상 나타나리라 ---
지상이 이 게송을 듣고서 마음이 확 열리어 제가 또한 게송을 지으니
--  제 성품 깨달음의 본원체가
    봄과 앎을 따라서 잘못 흐르니
    조사실에 들어오지 않았던들
    아득히 두머리(知와 見)로 나아갔으리 --

  지도(祉)를 깨닫게 함

  제가 출가한지 10여년간 열반경을 읽었아오나 대의를 모르오니 원컨데 화상께서 가르쳐 주옵소서
  네가 어디를 모르느냐 ?
모든 것이 덧없이 나고 죽는 법이라,나고 죽음 없애면 적멸함이 낙이라는 구절에 의혹이 생기나이다  (諸行無常 是生滅法 生滅滅已 寂滅爲樂)  
  네가 어떻게 의혹을 가지느냐 ?
  일체 중생이 다 두몸이 있으니,즉 색신과 법신이라 하겠지요. 색신은 덧 없어 생도 있고 멸도 있으나,법신은 떳떳하여 앎도 없고 깨달음도 없거늘 , 경에는 나고 죽음 없애면 적멸함이 낙이라 하셨으니 무언지 알수 없나이다.
어느 몸이 적멸해지는 것이며 어느 몸이 낙을 받는 것입니까 ? 만약 색신이라면 색신이 멸할 때에 사대가 흩어져서 모두가 고일지니 고를 낙이라 할수 없으며, 만일 법신이라면 적멸해서 곧 초목와석과 같으니 누가 낙을 받습니까 ? 또 법성은 생멸의 체(體)요 오온(五蘊)은 생멸의 용(用)이니 , 일체와 오용이 생멸함이 떳떳한지라, 생한 즉  체를 쫓아서 용이 일어나고 멸한 즉 용을 거주어 체로 돌아감이니, 만약 다시 생한다고 하면 유정지물이 끊어져 버리지 않는 것이며, 만약 다시 생하는 것이 아니라 하면  길이 적멸로 돌아가서 무정지물과 같은지라, 그렇게 되면 모든 법이 열반에 구속되어서 오히려 생할 수가 없을지니 무슨 낙이 있겠나이까 ?  
  네가 불제자로서 어찌 외도의 사견을 익혀 가지고 와서 최상승법을 의논하려 하느냐 ? 네말대로 하자면 색신 밖에 따로 법신이 있고 생멸을 떠나서 따로 적멸을 구하는 것이며 또한 열반상락을 몸이 있어서 수용(受用)하는 줄로 착각하는 것이니, 이는 생사를 아끼고 세속의 낙(世樂)에 빠진 것이니라.  너는 이제 마땅히 알아야 한다. 모든 어리석은 사람이 오온화합을 인식하여 자체상(自體相)을 삼고, 일체법(一切法)을 분별하여 외진상(外塵相)을 삼아서 생을 좋아하고 사를 싫어하며, 생각과 생각이 변하여 움직이지만 그것이 꿈이며 허깨비임을 모르고, 잘못 윤회에 빠져서는 열반상락을 도리어 고(苦)로 알고, 종일토록 매달려 구하므로 부처님께서는 이를 불쌍하게 여기셔서 여기에 열반진락을 보이셨으니, 찰나에도 생하는 상이 없고 찰나에도 멸하는 상이 없어서 , 다시금 생과 멸을 없앨 것도 없으므로 이것이 바로 적멸이 그의 앞에 나타남이라.  앞에 나타나도 그때에 앞에 나타난다는 헤아림도 없느니 이것이 이른바 상락(常樂)이라 하느니라.  이 낙은 받은 자도 없고 또한 받지 않는 자도 없거늘 어찌  일체(一體)니 오용(五用)이니 하는 이름이 있으며, 더구나 어떻게 열반의 구속을 말하여 모든 법이 길이 생하지 않는다 할 것이냐 ? 이건 부처님을 비방하고 법을 헐뜯는 행위니라.

회양선사 (懷讓禪師)에게 예언을  함

--  어디서 왔는가 ?         숭산에서 왔나이다
--  어떠한 물건이 이렇게 왔는가 ?        설사 한 물건이라도 맞지 않나이다
--  닦아서 도리어 얻는 것이냐 ,아니냐 ?
    닦아서 얻음이 없지 않으나, 물들어 더러워짐은 없나이다
--  그렇게 물들지 않는 것이 모든 부처님께서 지키시는 바이니,네가 그러하다면 나도 또한 그러하니라.  서천의 반야다라가 예언하기를  너의 발밑에서 한 망아지가 나와서 천하의 사람들을 밟아 죽이리라 했으니, 이 말은 네나 알고 있고 가볍게 발설하지 마라  
* 반야다라의 예언은 회양의 문하에서 마조(馬祖)가 나와서 크게 법을 펼 것을 말한것임

  현각(玄覺)의 법도를 가늠함

육조혜능 :   대체로 사문이란 삼천위의와 팔만세행을 갖추어야 하거늘,
             대덕은 어디서 왔기에 이렇게 큰 아만을 내는가 ?
현각 :   나고 죽는 일이 크며, 덧없음이 매우 빠르옵니다
혜능 :   어찌하여 남이 없음( 無生)을 깨닫지 않으며 빠름이 없음을
         알려하지 않는가 ?
현각 :   얻음에 곧 남이 없으며, 앎에 본디 빠름이 없사옵니다  
혜능 :   옳다, 옳아

그러자 현각은 위의를 갖추고 절한 다음 조금 있다가 하직을 고하였다.

혜능 :   도리어 너무 빠르지 않느냐 ?
현각 :   본래 움직임이 아니온데 어찌 빠름이 있사옵니까 ?
혜능 :   누가 움직임이 아님을 아느냐 ?
현각 :   당신께서 스스로 분별을 내시옵니다
혜능 :   네가 무생지의(無生之意 /태어남이 없는 뜻)를 얻었구나
현각 :   남이 없는데 어찌 뜻이 있나이까 ?
혜능 :   뜻이 없으면 누가 분별하는가 ?
현각 :   분별함이 또한 뜻이 아니옵니까 ?
혜능 :   착하도다. 하루밤이라도 쉬어서 가거라
그날밤을 자고간 현각을 후세 사람들은 일숙각(一宿覺)이라 칭하였다.

  지황(智隍)에게 선(禪)의 진의를 깨우침

선객 지황이 처음 5조께 참례하고는 스스로 이르기를  이미 바르게 받았노라(正受) 며 암자에 살면서 앉아 있기를 20년이 지났다.
대사의 제자 현책이 지방을 돌다가 하삭(河朔)에 이르러 지황의 이름을 전해 듣고 그에게 찾아가 물었다.
   그대가 여기서 무엇을 하는가 ?
   정(定)에 드노라
   정에 든다하니 마음을 가지고 드는가 아니면 없이 드는가 ?   만약 마음이 없이 든다면 뜻이 없는 모든 초목와석도 마땅히 정에 들어야 할 것이요, 만약 마음을 가지고 든다면 모든 뜻이 있는 생물들이 정을 얻어야 할것이 아닌가 ?
   내가 정에 들 때에는 있다 없다 하는 마음이 있음을 보지 않노라
   있다 없다 하는  마음을 보지 않는다면 이는 항상 정에 있는 것인데,
어찌 출입(出入)이 있는가 ?  만약 출입이 있다면 곧 대정(大定)이라 할수 없다
이말에 말문이 막혀버린 지황이 한참 동안 가만히 있다가 묻기를,
   당신의 스승이 누구인가 ?
그리고 현책이 자기의 스승이 육조스님이라 이르고 선의 진의를 간략하게 일러 주었다.
   우리 스승께서 말씀하시는 선정은 맑고 고요하며 뚜렷이 밝아서 체와 용이 여여하며, 오음이 본래 비었고 육진이 있는게 아니라, 나아감도 아니며 들어옴도 아닌 바, 정해짐도 아니요 어지러움도 아니며, 선의 성질이 머무름이 없는지라  선의 고요함을 떠났으며, 선의 성질이 남(生)이 없는지라 선의 생각냄을 떠났으므로 , 마음이 허공과 같으되 또한 허공 같다는 헤아림이 없는 것이니라
이 말을 듣고  난 지황이 이내 육조 혜능대사를 찾아 뵙고 법어를 청하였다.
    진실로 현책의 말과 같다. 너는 다만 마음을 허공 같이 하되  빈것으로 보는데 빠지지 말며, 응하여 씀에 걸림이 없이하되 움직임과 그침을 무심으로 하며 , 범부니 성인이니 하는 생각을 없이하며, 능(能/능히 하는 나)과 소(所/ 할바인 경계)를 모두 없이하여, 성(性=內體)과 상(相=겉모습)이 여여하면 定 아닌 때가 없느니라  
지황이 여기서 큰 깨달음을 얻으니 20년 동안 애써 왔던 것은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았다. 그날밤 하북 사람들의 귀에 공중소리가 났는데,
   지황선사가 오늘에야 도를 얻었다   하였다.









8. 돈점품 (頓漸品)

   최상승인(最上乘人)의 계정혜 (戒定慧)

신수대사의 제자인 지성(志誠)이 스승의 지시를 받아서 육조스님 앞으로 법을 배우러 갔다. 여기서 최상승의 게정혜가 무엇인지를 비로소 터득한다.
혜능은 이렇게 설파한다.
    들으니 너의 스승이 계정혜를 가르친다 하니 너의 스승이 설하는 계정혜가 어떠한 것인지를 말씀해 보시게  
  지성이 말씀 올리기를,
    신수대사의 말씀으로는 모든 악을 짓지 않는 것이 계이며 모든 선을 받들어 행함이 혜이며 , 그 뜻을 스스로 맑힘이 정이라 하옵는데, 화상께서는
어떤 법으로 사람을 가르치시나이까 ?  
  대사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만약 법을 가지고 있어서 사람에게 준다면 곧 너를 속이는 것이니, 다만 경우에 따라서 얽힌 것을 풀어 주는 걸 가명(假名)으로 삼매(三昧)라 할 뿐이다.  너의 스승이 말하는 계정혜는 실로 알수 없으나 내가 보는 계정혜는 그런 것이 아니다  
    계정혜는 다만 한가지로 아옵는데 어떻게 다시 다를 수가 있나이까 ?  
하고 지성이 다시 여쭈었다.
    네 스승의 계정혜는 대승인을 상대로 하는 것이지만 , 나의 계정혜는 최상승인을 제접(提接)하는 것이라, 깨달아 앎이 같지 않고 보는데 또한 더딤과 빠름이 있나니 내가 말하는 것이 저와 같은가 들어 보아라.
내가 말하는 법은 자성을 떠나지 않나니, 본체를 떠나서 설하는 법은 상설(相說)이라 이르는바,그걸로는 언제나 자성(自性)을 모르는 것이니라.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 일체 만법이 모두 자성을 따라서 일어나는 작용인 줄을.  이것이 바로 계정혜이니라. 내 게송을 들으라  
  ---- 마음자리에 그른 것이 없으면 자성계요
       마음자리에 어리석음이 없으면 자성혜요
       마음자리에 어지러움이 없으면 자성정이요
       더하지도 않고 덜하지도 않음이 자금강(自金剛)이며
       몸이 왔다가는 몸이 또한 가고는 함이 본삼매(本三昧)니라

     ( 心地無非 自性戒   心地無痴 自性慧
       心地無亂 自性定   不增不減 自金剛
       身去身來 本三昧  )

이에 감사하는 게송을 지성이 다음과 같이 올렸다.
----   오온 허깨비 몸이여
       허깨비가 어찌 끝이 있으리
       다시금 진여로 나간다 하면
       법을 도리어 더럽힘일쎄
     ( 五蘊幻身 幻何究竟 , 廻趣眞如 法還不淨 )

  지철에게 상(常)과 무상(無常)을 가르침

북종에서 자객으로 왔던 장행창은 스님을 해치지 못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중이 되었다가, 스님이 언젠가 오라고 하는 말을 떠올려 다시 찾아 뵙게 되었다.
    제자가 항상 열반경을 독송하오나 상과 무상을 아지 못하오니 화상께서는 자비로 가르쳐 주옵소서  
-    덧없음(무상)이란 곧 불성이요, 떳떳함이란 일체 선악과 모든 법을 분별하는 마음이니라  
    화상께서 설하심은 경문과 무척 크게 다르나이다  
-   내가 부처님의 심인(心印)을 받았거늘 어찌 불경과 다르다고 하느냐 ?
    경에는 불성을 떳떳함이라 하셨거늘 화상께서는 반대로 덧없음이라 하시며, 선과 악의 모든 법과 보리심까지도 모두 덧 없음이라 하셨는데 화상께서는 도리어 떳떳함이라 하시니, 이렇게 달라 가지고서야 어찌 저 같은 학인으로서 의혹이 없겠나이까 ?
-   열반경을 전에 내가 비구니 무진장으로부터 독송하는 것을 한번 듣고
바로 설명해 준 일이 있으나, 한구절 한글자도 경문에 맞지 않는 것이 없었으며 이제 네게 말하는 것도 역시 마찬가지니라  
    학인이 아는 게 없고 소견이 어두워서 잘 모르겠사오니 화상께서는 좀 더 소상히 열어 보이소서  
-   너는 아는가 ?  불성이 만약 떳떳함이라면 다시 어떻게 선악제법을 설할수 있을 것이며, 또 겁(劫)이 다하도록  보리심을 발할 사람이 있을 것인가 ?  그러므로 내가 덧없음이라 함은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참 떳떳함(眞常)의 도리이며 또 일체제법이 덧없음이라 한다면 즉 물건마다 모두 제 성품이 있어서 생과 사를 받아 들이므로 참 떳떳한 성품이 두루하지 못하는 곳이 있을지니,  그래서 내가 말하는 떳떳함이란 바로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참 덧없음을 뜻하는 것이니라.  다시 말하자면 부처님께서는 저 범부 외도들이 삿된 떳떳함(邪常 = 굳어져서 변통이 일지 않는 것으로 아는 상)에 빠지고, 모든 이승인(二乘人 = 聲聞과 緣覺)이 떳떳함을 덧없음으로 알아서 함께  여덟가지의 뒤집힘(八到)을 이루기 때문에 열반요의교(涅槃了義敎) 속에서 치우친 소견을 없애 주시었느니라.  여기서 부처님은 참 떳떳함과 참 즐거움과 참된 나와 참 조촐함을 밝혀 주셨거늘 ,네가 이제 말만 따르고 뜻을 등져서 아주 끊어져 없는 덧없음(無常)과 확정되어 죽어버린 떳떳함(死常)으로써 부처님의 원묘하신 마지막 말씀을 잘못 받아 들였으니, 그러고서야 어디 천번을 읽은들 무슨 소득이 있겠는가 ?  
* 팔도: 고를 낙으로 알고, 무상을 상으로 알고,아를 무아로 알고, 정을 부정으로 아는 범부 사도와 이승사도를 합한 것을 가리킨다
이 말씀을 들은 장행창은 홀연히 깨닫고 게송을 바쳤다.
    덧없음을 지키는 마음 때문에 부처님이 덧떳함을 말씀하셨네.  이것이 방편임을 알지 못하면 조약돌을 보배라고 줍는 것 같네.   내 이제 아무 공도 베풀음 없이 불성이 이렇게 나타남이여.  스승께서 주신 것도 아님이거니 내 또한 얻은 바가 없음이로다  
스승은 그에게 뜻이 투철하다 하여 새로이 지철이란 이름을 지어주셨다.

  신회(神會)에게 보는 것을 가르침

  신회가 13살 때 스님을 찾아와서 절하거늘 대사께서 질문을 던지셨다.
    지식이 먼데서 오느라 수고 하였으니 근본을 얻어 가지고 왔는가 ? 만약 근본이 있다면 주인공을 알 것이니 어디 한번 말해 보아라  
    부주(無主)로써 근본을 삼으니 보는 것은 곧 주인공이옵니다  
    이 사미가 그 다음 말을 할 수가 있을 까 ?   하고 되물으니,
    화상은 좌선할 때 도리어 봅니까 안봅니까 ?   하고 다시 물었다.
대사께서는 주장으로 세번 그를 때리고 물으시길
    내가 너를 때렸는데 너는 아프냐 ? 안 아프냐 ?   하시니
    또한 아프기도 하고 도한 아니 아픕니다   하였다.
    나 역시 또한 보고 또한 아니본다   하시니
사미는 재차 물었다.
    어떠한 것이 또한 보고 또한 아니 보는 것입니까 ?  
    내가 보는 것은 항상 자기 허물을 보고 남의 옳고 그름과 좋고 나쁨을 보지 않느니, 이것이 또한 보고 또한 보지 않음이건데, 네가 말하는 또한 아프고 또한 아니 아프다 함은 어떠한 것이냐 ?  만약 네가 아프지 않다면 목석과 같을 것이요, 아프다면 범부라서 미운 마음과 원한이 일어날 것이니, 네가 보고 안 보고함은 두갓(二邊)이요, 아프고 안 아프고 함은 생과 멸이니, 네가 자성을 보지 못하고 감히 사람을 조롱하느냐 ?  
그러자 신회는 절을 하며 사죄하였다.
  이어서 대사께서 말씀하시길,
    네 만일 마음이 어두워서 보지 못하였거든 선지식에게 물어서라도 길을 찾을 것이요,   만약 마음이 열려서 스스로 견성하였거든 법대로 닦아야 할 것인데, 네 스스로 어두워 제 마음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내게 보고 안 봄을 물으니 내가 보는 것은 내가 알 것이라,어찌 대신 너를 모르게 할 것이냐 ?  그런데 왜 스스로 알려 하지 않고 내게 보고 안 봄을 묻느냐 ?  
이 말씀에 신회 사미는 다시 백여배나 절을 하면서 용서를 빌었다.

9. 선조품 (宣詔品)

  당나라 중종 때 측천과 왕이 혜능을 불러 모시어 법어를 청하려 사람을 보냈다. 내시 설간은 그때 스님에게 달려가 심부름을 맡은 사람이다.
설간이 말했다.
    제자가 서울에 돌아가면 주상께서 반드시 물으실 것이오니원컨데 스님께서는 자비로서 심요(心要)를 지시하시옵소서. 양궁께 아뢰고 서울의 도를
배우는 자달에게 전하여서 마치 한 등불이 백천의 등불에 불을 붙히듯이 어두운 자를 밝게 하고 그 밝음이 다함이 없도록 하여 주소서  
    도에는 밝고 어둠이 없는 바이니라.  밝음과 어둠은 서로 대사(代謝)하는 뜻이라서 밝고 밝음이 다함이 없다는 것도 또한 다함이 있는 것이니, 서로 대대(對待)하여 세운 이름인 때문이니라. 정명경에서 말씀하시기를 --법은 견줌이 없나니 상대가 없기 때문이다--라 하셨느니라  

설간이 다시 여쭙기를,
    밝음은 지혜에 비유하고 어둠은 번뇌에 비유했으니 도 닦는 사람이 만일 지혜로써 번뇌를 비추어 가지고 없애지 않으면 비롯함이 없는 생사를 어떻게 벗어나오리까 ?  
    번뇌가 곧 보리라.  둘이 아니며 다른 것이 아니니, 만약 지혜로써 번뇌를 비추어 가지고 없애려 한다면 이건 이승(二乘)의 견해이니라. 이는 양과 사슴의 근기이니 상근대지인(上根大智人)은 그렇지 않느니라  
    그러면 대승의 견해는 어떠한 것이옵니까 ?  
    밝음과 어두움을 범부는 둘로 보나 지혜로운 자는 그 성품이 둘이 아닌 것을 보나니, 둘 아닌 성품이 곧 실성이며 이 실성은 범우에게 있어서도 줄지 않고 현성에게 있어서도 늘지 않으며, 번뇌에 머물러도 어지럽지 않고 선정에 있어서도 고요하지 않으며, 끊어짐도 아니요, 떳떳함도 아니요,오는 것도 아니요, 가는 것도 아닌 바, 안이나 밖이나 그 중간에 있는 것도 아니요, 생도 아니요, 멸도 아니어서, 성품과 모양이 여여하여 머물러서 변천하지 않는 것을 도라 하느니라  
다시 설간이 여쭙기를,
    스님께서 말씀하시는 생도 아니요 멸도 아니라 함은 외도들이 말하는 것과 어떻게 다르옵니까 ?  
    외도들의 말에 의하면 죽음을 가지고 남을 막으며,남을 가지고 죽음을 나타내는 것이라. 그래서는 멸을 오히려 불멸이라 하고 생을 오히려 불생이라 하는 것이거니와, 내가 말하는 것은 본래부터 생이 없으므로 이제 멸 또한 없는 것이라 이름이다.   그런 점에서 외도와는 같지 않느니라.  네가 만약 심요를 알고자 하거든 모든 선과 악에 도무지 따져보는 생각이 없으면 자연히 청정심체에 들어가게 되어 맑고 고요함 속에 묘한 작용이 한량 없으리라  
설간은 대사의 가르치심에 크게 깨닫고 절하여 하직한 후 대궐에 돌아가서 그러한  말씀을 갖추어 아뢰었다.
그 해 가을에 대사께 조서가 있었는 바 내용은 이러하다.
    대사께서 늙고 병들었다 사양하시와 짐에게 도를 닦게 하시니 나라의 복밭이라, 마치 정명거사가 비야리성에서 병을 칭탁하고 대승을 드날림과 같이, 모든 부처님의 마음을 전하시고 둘 아닌 법을 말씀하시와, 짐이 선을 쌓은 보람이며 숙세(宿世)에 선근을 심은 인연으로 대사께서 세상에 나오심을 만나게 되어 바로 상승을 깨달았아오매 대사님의 은혜에 감사하여 마지 않나이다  

10. 부촉품(付囑品)

---  마음 땅이 머금은 부처의 씨앗을 법비로써 모두다 싹을 틔우네
     돈오라는 꽃이 지고 나며는 보리의 열매가 절로 이루리 ---

대사께서 게송을 설하시고 말씀하시기를
  그 법이 둘이 없으니 마음이 또한 그러하며 , 그 도가 또한 청정하여 모든 상이 없으니 너희들은 부디 고요함을 관하거나 마음을 비우거나 하지 말아라.  이 마음은 본래 고요하고 조촐하여 가히 취하거나 버릴게 없나니, 각각  스스로 힘써 힌연을 따라 잘들 나아가거라   하시니 무리들은 절하고 물러 가니라.

  정법안장은 누구에게 부치나이까 ?  
  도 있는 자가 얻고 마음 없는 자에게 통하느니라  
  뒤에 무슨 어려움은 없겠나이까 ?  
  내가 간뒤 오륙년 만에 어떤 사람이 와서 내 머리를 가져 가리라.  내 알림을 들으라.
  머리위에 어버이를 기르고  입속에 모름지기 먹는다.
  만의 난을 만나서 양과 유가 관이 되리라
  (頭上養親 口裏須餐 遇滿之難 楊柳爲官 )
이어 말씀하시길
  내가 간뒤 70년만에 두 보살이 동방으로부터 와서 하나는 출가하고 하나는 재가 하면서 동시에 교화하여 내 종(宗)을 세우고 법을 크게 일으켜 가리라  

대사께서 선천 2년 계축 8월 3일에 국은사에서 재를 마치시고 모든 무리들에게 이르시기를,
  너희들은 차례대로 앉아라.  내가 너희들과 작별하리라  
이에 법해가 사뢰어 말씀드리기를,
  스님께서 어떠한 교법에 머물으시와 후대에 모르는 사람들로 하여금 불성을 보게 하시나이까 ?   하였다.
  너희들은 잘 들으라.  후대 사람들이 만약에 중생을 알면 곧 이 불성을 안 것이며, 만약 중생을 알지 못하면 만겁을 찾아도 부처를 만나지 못하리라.  내 이제 너희들로 하여금 제 마음의 중생을 알게하고 제 마음의 불성을 보게 하리니, 부처 보기를 구하거든 다만 중생을 알아라.  중생이 부처를 모르는 것이요, 부처가 중생을 모르게 함이 아니니, 만약 제 성품을 깨달으면 중생이 이 부처요, 제 성품을 모르면 부처가 이 중생이며 제 성품이 평등하면 중생이 이 부처요, 제 성품이 사악하면 부처가 이 중생이라.
  너희들의 마음도 만약 험악하고 굽었다면 부처가 중생 속에 묻힌 것이며 한결같이  생각이 평등하고 곧으면 곧 중생이 성불하는 것이니라.
  내 마음에 스스로 부처가 있으니 이 제 부처가 참 부처라. 제 스스로 부처가 없다면 어디에서 참 부처를 구하랴 ?  너희들은 제 마음이 부처임을 추호도 의심하지 말라.  원래 한 물건도 없으되 밖으로 능히 모든 것을 세우는 것은 다 이 본심에서 만법(萬法)이 나기 때문이니, 그러므로 경에 이르기를   마음이 나면 가지가지 법이 나고, 마음이 멸하면 가지가지 법이 멸한다   하시니라.  이제 게송을 하나 남기고 너희들과 작별하리니 이름이 자성진불게라, 후대 사람이 이 게송의 뜻을 알면 스스로 본심을 보아 스스로 불도를 이루리라  
그리고 게송을 설하시니 다음과 같다.

--- 진여자성은 이 참 부처요
    사견삼독은 이 마왕이니
    삿되고 어둘 제는 이 마왕이 사는거요
    바른 소견 쓸 제는 부처가 계심이라
    사특한 소견에서 삼독이 일어나면
    마왕이 들어와 사는 것이요
    올바른 소견으로 삼독심을 없애면
    마왕이 변하여 부처 된 것이로다
    법신과 보신과 화신이라 이르나
    삼신이 본래 일신이시라
    성품 속을 향하여 스스로 보면
    이게 곧 성불하는 보리인(菩提因)이니
    화신에서 조촐한 성품이 나매
    조촐한 성품이 화신 속에 항상 있다
    성품이 화신으로 바른 길 가게 하면
    앞으로 원만하여 다함이 없으리라
    음난한 성품이 조촐한 성품이니
    음난함을 제하면 그게 곧 조촐한 몸
    성품 속에 스스로 오욕을 떠나
    견성하는 찰나가 바로 이 참이라
    이생에 만약 돈교문(頓敎門)을 만나서
    제 성품 깨달으면 부처를 보는 것을
    수행하여 부처를 찾는다 하면
    어디에서 참된 것을 구할 것이냐 ?
    만약 능히 제 마음 속을 보아서
    참됨이 있으면 성불하는 인(因)이니
    제 마음 보지않고 밖으로 부처 찾아
    마음을 일으키면 모두 다 어리석다
    돈교법문에 이제 머물러서
    세상 사람들을 스스로 닦게하니
    앞으로 도 배우는 무리들이여
    이런 견해 없애고 크게 유유(悠悠)하여라 ---

  내가 멸도한 후에 이대로 닦아 가면 내가 있을 때나 다름 없으려니와
만일 나의 가르침을 어긴다면 비록 내가 이 세상에 있더라도 유익함이 없으리라  

    어리석은듯 선도 닦지말고
    드높은듯 악도 짓지말며
    적적히 하여 보고들음 없이하고
    탕탕히 하여 마음 걸림 없이하라

    ( 兀兀不修善 勝勝不造惡
      寂寂斷見聞 蕩蕩心無着 )              육조단경  끝  940823 處暑

      2005년 9월 30일 원문에서 전재/김세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