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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마법문] " 금강삼매경의 비밀"

2016.04.22 12:24

xemasa 조회 수:4397

[제마법문] " 금강삼매경의 비밀"

 

 

 


(1) 서문


2016 년 3 월 하순,

금강삼매경을 공부하는 학당인 일본 고야산의 금강삼매원이라는 강원(법강을 주로 하는 사찰)에서 우연히 원효대사님을 친견하게 되었습니다.

여전히 깡마른 몸집에 자그마한 체구 , 그리고 빛을 되쏘는듯한 강렬한 눈빛의 대사님은

언제 보아도 정말 훌륭하신 분입니다. 


금강삼매원은 조용한 사찰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아무도 없는 절뜨락으로 들어서자

구석진 곳에 홀로 앉아 계시는 스님이 눈에 띄었습니다.

스님은 정좌를 하지 않고 우리가 늘 보고 만나는 시골 영감님같은  자세로 다보탑 계단에 걸쳐 앉아 계시다가, 다가가는 저에게 아주 가까이 허공처럼 밀려 오셨습니다.

안개를 먹음은 듯한 표정으로 슬며시 웃음 띄운 얼굴로,

 

" 여긴 어인 일로 오셨는가 ? 휴정스님도 곁에 계시구먼.... 이 먼곳을 어찌 찾아 오셨는가 ?"

반가운 우리는 스님의 말씀을 끊지 않고, " 여기 계실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예전에 한국땅에서 기도하다가 만나 뵌 적은 있었습니다만, 이렇게 느닷없이 찾아와서 폐 끼치게 되어 죄송합니다."

" 무슨 말을,,, 그러쟎아도 먼발치에서 기다리고 있었다오."


스님은 우리의 질문에도 넉넉한 호흡을 가다듬으시며 말씀을 이어 나가십니다.


" 내가 여기 있게 된 것은 이들(일본스님)이 나의 경전(삼매경) 오로지 하나만 가지고

1,200 년동안 주석을 달아가면서 공부 수행하기 때문이야요. 그렇쟎으면 벌써 몸을 나투어서라도 한국땅에 가 있었겠지요. 공부하는 사람들에게는 국경이 없으니까 일본 땅에 여태껏 머물고 있지요."


금강삼매원이라는 일본의 사찰은 말씀 그대로 천년이 넘는 세월에 걸쳐 삼매 하나만으로

명맥을 이어나가는 밀교사찰입니다. 물론 금강봉사(金剛峯寺)가  몇 100미터도 안되는 바로 옆에 있으나 원효스님이 주석하신 이곳은 오래 동안 금강삼매경 목판을 보관한 절입니다.


"  제가 금강삼매경론을 현대적 시야에 맞춰 새로 해석하고자 합니다만, 오셔서 도움을 주시겠습니까 ?"

지긋한 웃음을 띄인 스님의 말씀이 천천히 답을 주십니다.



" 그럼 자네라면 제대로 현대적인 해석을 잘 전해 주어 많은 이들이 공부하는데 도움이 되어 줄 걸로 믿고 있네..... 시작해 보게"




(2)  스님께서 금강삼매경론을 쓰실 때 생긴 일  ?



잘아시다시피 이 경전은 원효스님이 만든 경전입니다.

송나라에서 전해진 경전에 주석을 달았다기 보다는 전체적인 흐름으로 보아서

원효스님의 작품입니다.


스님이 저에게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삼매경론을 작성하실 때의 감춰진 에피소드를 넌지시 전해주시더군요.


" 내가 왜 뿔 두개 달린 짐승을 구해다오. 했는지를  아시는가 ?"


금강삼매경론을 펼치실 때에 법히모음을 열었는데 그 자리에 가시기 전에

소등에 올라타고 소의 두뿔 사이에 지필묵(종이.벼루,먹)을 준비하라고

하셨는데, 그 까닭이 뭔지  알고 있냐고 물으십니다.


" 제가 어찌 알겠습니까, 저도 참 기이한 일이라 생각은 했습니다만..."


슬그머니 오른 손으로 제 머리를  가볍게 두드리시며,

첫말를 꺼내십니다.



" 소의 머리에는 두 뿔이 있지 않은가 ? 그리고 그 사이에 지필묵을 두고서

경줄을 써내려 간 이유는 , 소의 뿔이 곧 각(角)이라고 할수 있지 않은가 ?"


" 소의 뿔이 각이라니요 ?"


" 한문으로 뿔을 각(角)이라고 하고 깨달음도 각(覺)이라고 하지.... ?"


" 네 , 그렇습니다."


" 그러니까 쇠뿔 두 개가 곧 이 경전의 기본이 되는 두가지의 깨달음이라고 할

본각(本覺)과 시각(始覺)을 가리키고 있네.  사실 이 걸 내가 말로 해서 

알려주고 싶었지만 너무 장난끼가 있을 것 같아서 가만히 천년 이상 입다물고 있었지." 


그 순간 등골이 오싹할 정도의 소름이 끼혔습니다.

아마도 원효스님의 법력 때문인 듯합니다.

 

송나라 때 만든 송고승전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 원효스님께서 이 금강삼매경을 받은 것은 고향인 상주에 계실 때였다. 원효스님께서 사신에게 말하기를, '이 경전은 본각(本覺)과 시각(始覺)의 두 가지 깨달음을 종지로 삼고 있습니다. 저를 위하여 두뿔달린 짐승이 끄는 수레를 준비하여  소의 두 뿔 사이에 작은 책상을 얹어두고 지필묵을 마련해 주십시오."

 

본각(本覺)이란 인간이 태생적으로 타고 나서 이미 갖추고 있는 본딧자리의 깨우침(佛性覺)이며,

시각(始覺)은 수행을 거듭함으로써 얻어지는 깨우침인데,

이를 쇠뿔 두 개로 비유하신 셈입니다. 그리고 쇠뿔 사이에 붓을 두고 금강삼매경을 집필하셨다 함은

다시 말해서 그 사이에 걸림 없이 원융법문의 자유로운 필적을 남기셨다는 뜻이 됩니다.


스님이 다시 강조하십니다.


" 자네가 이 경전에 대해서 현대적으로 새로운 해석을 하여 풀이해 준다고 하니 곁에서  힘을 실어 주는 의미와 함께, 내가 도와준다는 증명으로 한 마디 더 해주겠네... 하필이면 왜 내가 말을 타고 가겠다 하지 않고 소를 타고 간다고 했는지 그 이유를...."


스님께서 도와주신다니 정말 머쓱해집니다.


" 소(牛)를  타야 제대로 소()가 술술 씌어질 것 같아서 말이야 , 하 하 하 ...."


금강삼매경론은 원래 소(해설서)로 스신 것인데, 나중에 중국에서 그 중요한가치를 인정받아 논으로 불려집니다. 그러니까 중국에서 신라의 소()가 논(論)이 된 최초의 사례이지요.

한편으로 원효스님이 유머를 갖추신 분인지 처음 알았습니다.

이 분이 지니신 무애자재라 하심은 곧 이런 장난끼도 포함되는가 봅니다.

아무튼 차차 스님의 힘이 닿은 강좌를 하게 되어 너무나 즐겁습니다.



그런데 잘 살펴보면 왕후의병을 고쳐주시기 위하여 이 경전을 논소로 만들고

그 법문을 펼치시게 된 바, 제가 보기에는 소의 뿔이 깨달음을 상징한다기 보다는

아마 소를 타고 가는 일이 일종의 병 고치는 주술법이 아니었을까 하는 추정도 가능합니다.

소뿔은 단단해서 병마를 물리치는 기능이 있으까요.

매우 다의적인 방도(方途)로 보입니다.




(3)  금감삼매경론에서 드러나게 보여주는 영혼의 존재




하품에 드는,  진성공품에 이런 부분이 나옵니다.

잘 보시면 두 분께서 무슨 말을 하는지 내용이 감감합니다.

여기에 영적인 용어를 가미하면 금방 이해가 되는

신기한 면이 있으니 , 금강삼매경이야 말로 영혼의

존재를 증명하는 경전이라 하겠습니다.

이게 무슨 귀신들이 씨나락 까먹는 소리인가 하고 이해하기 힘드시겠지만

잘 살펴 해석해 보면 아래와 같은 내용으로 정리가 가능해지거든요.

그래서 영적 차원의 이해가 필요하다고만 생각하여, 그저 신비한 말씀을 하시는구나 하고

훌쩍 넘어가서는 안 될 것입니다.




[원문]



 經曰。舍利弗言一切萬法皆悉文言文言之相即非為義如實之義不可言說今者如來 云何說法   


論曰。此下大分第三明佛言教稱如理說。先問後答。問中言一切萬法者。世間言 說所安立法。如言之法皆無所得故。唯文言即非為義。諸法實義絕諸言說。今佛說法 若是文言即無實義。若有實義應非文言。是故問言云何說法   

원효스님의 윗부분 해석을 보시면...

세상에서 법을 말로 그 뜻을  설명하기 어렵다 하시니 말이 아닌 그 무엇으로 해설하시겠나이까 물으신다.


經曰。佛言 ,我說法者以汝眾生在生說故說不可說是故說之我所說者義語非文眾生 說者文語非義非義語者皆悉空無空無之言無言於義不言義者皆是妄語如義語者實空不 空空實不實離於二相中間不中不中之法離於三相不見處所如如如說如無無有無有於無 如無有無有無於有有無不在說不在故不在於如如不有如不無如說

 


[일반적인 해석]




그런데로 알아 들을 수 있게 해석하신   용성대사님(1969년판 참조)의  해석을 가지고 풀어 봅니다.



<사리불의 질문>


사리불이 묻습니다.

" 일체의 법은 문자와 말로 표현됩니다. 문자와 말의 모양은 곧 뜻이 되지 않으므로 여실한 뜻을 말로 설할 수가 없다면 이제 여래께서는 어떻게 법을 말씀하시겠나이까 ?"



<석가여래님의 응답>



"' 내가 법을 설하는 것은 너희 중생으로서 중생을 위하여 말함은 그말로써 참뜻을 말하지 못하는 것과 같느니라.

이러한 연고로 나의 설함이란 <뜻말>이며 <글말>이 아니라 함은 , 다 비어 없음을 알지니, 비어 없는 말은 그뜻을 말함이 없느니라. 뜻을 말하지 못하는 것은 모두 다  망어(妄語)요.  뜻과 같은 말은...? 실다운 공은 공이 아니며 공이 실답다고 하는 것은 굳이 실답다 할 것도 없느니라.

두가지 모양을 떠난 <중간>이라 할지라도 , 중간도 아닌 법은 세가지 상을 모두 떠나기 때문에, 그것이 있는 자리(處所)를 알아 보기 어려우므로 그저 <여여/如如> 라고 말하느니라.

<여>가 없다고 말함은 본래 존재하는 것이 없음이라,

무엇이 있는데 없다고 할 까닭이 없으며 ,그 존재가 무엇이 있음에 따라서 상대적으로  존재한다는 뜻도 아니다.

있는 것도 없는 것도 모두 다 없으니,  그런 식으로 존재하지 않음을 말하기 때문에 <여> 자체도 있을 수 없다.

결국에는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님을 가리켜  <여>라고 말한다....(故不在於如如不有如不無如說 )'"







읽어 보시면 이 글이 정말 이해가 안 되실 겁니다.

절대로 해석이 잘못된 글이 아닙니다. 다만 영혼의 세계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알쏭달쏭할 뿐이지요.

자 그럼 제가 말을 바꿔서 속시원하게 풀어  드릴 게요.




 



[원효스님과 함께, 풀어 드리는 법문]







사리불이 묻습니다.


" 일체의 법은 문자와 말로 표현됩니다. 문자와 말의 모양은 곧 뜻이 되지 않으므로 여실한 뜻을 말로 설할 수가 없다면

이제 여래께서는 어떻게 법을 말씀하시겠나이까 ?"



여래께서 답하십니다.


"' 내가 법을 설하는 것은 너희 중생으로서 중생을 위하여 말함은 그말로써 참뜻을 말하지 못하는 것과 같느니라.

>>>>>

 "내가 법을 말하는 것은 내가 너희와 같은 중생으로서 중생들을 위하여 언제나 말하는 쉬운 말만 가지고서  확실하게 알아들을 만한 말만 해 가지고서는 그 참뜻을 알려주는 일이 오히려 불가능하다."



이러한 연고로 나의 설함이란 <뜻말>이며 <글말>이 아니라 함은 , 다 비어 없음을 알지니, 비어 없는 말은 그뜻을

말함이 없느니라.

>>>>>

이런 까닭에 내가 말하는 것은 입으로 전달하는 말이나 글로 표현하는 말이 아니라고 해야 하며,아무리 말로 표현한다고 하더라도 실제로 전달되는 말의 내용은 그 말만 가지고 술술 통해서 전해지 않는다.



뜻을 말하지 못하는 것은 모두 다  망어(妄語)요.  뜻과 같은 말은...?

실다운 공은 공이 아니며 공이 실답다고 하는 것은 굳이 실답다 할 것도 없느니라.

>>>>>

물론  뜻을 전하지 못하는 말은 그저 모두가 쓸데없는 거짓말이된다, 그럼 뜻이 그대로 전해지는 말이란 어떤 것을 가리키는가 ?

이에 대해서  예를 들어 비유하자면  실제로 존재하는 공이라고 말하는 모든 공은 공이 아니며 만약에 누가 공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굳이 그렇게 실답다고 말할 필요도 없으리라.



cf.

잠시 공에 대하여 생각해 보자.

극장에 가서  빈자리가 있을 때 "여기 자리 있어요" 하고 묻는다면 곁에 앉은 사람이 "아니요" 라고 하면

그 자리가 빈 것이 아니라 주인이 없다는 소리이듯이, 실다움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대상의 소유여부에 따라서

달라지는 것이다. 내가 그 자리에 앉고 싶으면 자리에 주인이 없어야 하고, 이미 맡아 놓은 주인이 있다면

그 자리는 내게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 자리는 현실로 보면 분명히 비어 있으니 주인이 있는지 없는지

관계 없이 비어 있는 것이다. 공도 마찬가지이다. 말도 마찬가지이다. 말도 들어서 쓸모가 있으면

그 말이 실다운 것이지만  관심조차 둘 만한 말이 아니면 그저 소리가 들릴 뿐 말로 들리지 않는다.

그러니까 어떤 자리가 비어 있어도 임자가 있으면 빈자리가 아니며, 임자가 없어야 빈자리가 되는 것을

이해하면 공의 실체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허망한지 조금 이해하게 된다.

 








두가지 모양을 떠난 <중간>이라 할지라도 , 중간도 아닌 법은 세가지 상을 모두 떠나기 때문에,

그것이 있는 자리(處所)를 알아 보기 어려우므로 그저 <여여/如如> 라고 말하느니라.

<여>가 없다고 말함은 본래 존재하는 것이 없음이라,

>>>>> 


법이라 하는 관념적인 대상은 있다는 개념과  없다는 개념과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는 개념 그렇게 모두 합헤서 세가지의 상을 모두 떠나야 이해가 가능한 개념이므로,

그 개념이 머무를 수 있는 자리가 정해져 있지 않은 까닭에 그저 할 수 없이 <여여>라고 애매하게 부른다. 그러니까 <여>가 없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본래 존재하는 것이 없다는 뜻이 된다.






무엇이 있는데 없다고 할 까닭이 없으며 ,그 존재가 무엇이 있음에 따라서 상대적으로  존재한다는 뜻도 아니다.있는 것도 없는 것도 모두 다 없으니,  그런 식으로 존재하지 않음을 말하기 때문에 <여> 자체도 있을 수 없다. 결국에는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님을 가리켜  <여>라고 말한다....(故不在於如如不有如不無如說 )'"


>>>>>>


무엇이 있는데 없다고 할 까닭이 없으며 ,그 존재가 무엇이 있음에 따라서 상대적으로  존재한다는 뜻도 아니다. 있는 것도 없는 것도 모두 다 없으니,  그런 식으로 존재하지 않음을 말하기 때문에 <여> 자체도 있을 수 없다. 결국에는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님을 가리켜  <여>라고 말한다....(故不在於如如不有如不無如說 )'"

 

 


 


cf.


사리불은 석가여래에게 "말이나 글이 허망한데 법을 어떻게 전하십니까?"하고 질문했는데

엉뚱하게도 공에 대한 개념과 법에 대한 개념을 설명하고 계십니다.

그렇게 전혀 주제가 다른 말씀을 하신 까닭은 바로 설명이 불가능한 개념을 말로 설명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설명해 주려고 해도 말과 글로서는 불가능한 주제이거든요.

차원이 전혀 다른 개념이므로 우리가 사용하는 말로는 절대로 알려 줄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석가여래께서는 왜 이렇게알듯 모를 듯한 비유로서  법과 진리에 대한 말씀을 하셨을까요 ?

참으로 의문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한 번 모두 모아서 정리해 봅니다.

확실하게 이해 되시지요 ?

그리고 그 배경에는 영적 차원의 의사소통만이 법과 진리를 이해하게 한다는 은근한

호소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부분은 영적 소통능력이 있어야 이해가 가능하다는

차원의 말씀이므로, 여래께서 영혼의 존재를 과감하게 드러내셨다고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머리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받아들이지 않기때문에 영적인 세계로 이동할 수 없는점에 대해서 다시 한 번 반추해 봐야 할 것입니다.





{총정리}



사리불이 묻습니다.


" 일체의 법은 문자와 말로 표현됩니다. 문자와 말의 모양은 곧 뜻이 되지 않으므로 여실한 뜻을 말로 설할 수가 없다면 이제 여래께서는 어떻게 법을 말씀하시겠나이까 ?"


여래께서 답하십니다.


 "내가 법을 말하는 것은 내가 너희와 같은 중생으로서 중생들을 위하여 언제나 말하는 쉬운 말만 가지고서  확실하게 알아들을 만한 말만 해 가지고서는 그 참뜻을 알려주는 일이 오히려 불가능하다."

이런 까닭에 내가 말하는 것은 입으로 전달하는 말이나 글로 표현하는 말이 아니라고 해야 하며, 아무리 말로 표현한다고 하더라도 실제로 전달되는 말의 내용은 그 말만 가지고 술술 통해서 전해지지 않는다.

물론  뜻을 전하지 못하는 말은 그저 모두가 쓸데없는 거짓말이된다, 그럼 뜻이 그대로 전해지는 말이란 어떤 것을 가리키는가 ?

이에 대해서  예를 들어 비유하자면  실제로 존재하는 공이라고 말하는 모든 공은 공이 아니며 만약에 누가 공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굳이 그렇게 실답다고 말할 필요도 없으리라. 법이라 하는 관념적인 대상은 있다는 개념과  없다는 개념과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는 개념 그렇게 모두 합헤서 세가지의 상을 모두 떠나야 이해가 가능한 개념이므로, 그 개념이 머무를 수 있는 자리가 정해져 있지 않은 까닭에 그저 할 수 없이 <여여>라고 애매하게 부른다. 그러니까 <여>가 없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본래 존재하는 것이 없다는 뜻이 된다.

무엇이 있는데 없다고 할 까닭이 없으며 ,그 존재가 무엇이 있음에 따라서 상대적으로  존재한다는 뜻도 아니다.

있는 것도 없는 것도 모두 다 없으니,  그런 식으로 존재하지 않음을 말하기 때문에 <여> 자체도 있을 수 없다. 결국에는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님을 가리켜  <여>라고 말한다....(故不在於如如不有如不無如說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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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1) 삼매의 정의


민족문화백과사전 중에서...


 삼매에 대한 정의를 내리고, 삼매를 정확하게 분류하여 설명한 경우는 많지 않았다. 이를 가장 명확하게 정의하고 분류한 대표적인 고승은 신라의 원효(元曉)이다. 원효는 ≪금강삼매경론 金剛山昧經論≫을 저술하면서 삼매의 의미를 가장 명쾌하게 설명하였다. 원효에 의하면, 삼매는 곧 정사(正思)로서, 정(定)에 들었을 때 관계되는 경계인 소연경(所緣境)을 깊이 살피고 바르게 생각하고 통찰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원효의 이와 같은 삼매관은 선종에서 천명한 선(禪)의 원리까지를 깊이 포용한 것으로서, 고려 중기의 고승 지눌(知訥)이 정혜쌍수(定慧雙修)의 사상을 제창하는 데 밑거름이 되었다. 그리고 조선 중기의 고승 휴정(休靜)은 삼매의 힘에 의해 능히 성현의 지위에 들어갈 수 있고, 세상의 모든 일을 밝게 알 수 있음을 ≪선가귀감 禪家龜鑑≫을 통하여 천명하였다....



(2) 아뇩다라삼먁삼보리와 반야바라밀의 차이점


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우주의 지혜입니다. 광대무변의 우주가 인간이라고 가정해 볼 때 그 신령이 지니고 있는 지혜이므로

당연히 신령스러운 지혜입니다.  반야바라밀은 우리 인간이 수행자가 되어 잘 닦은 마음으르 바탕으로 삼아서 어렵사리

얻은 밝디 밝은 지혜입니다.

그러므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으려면 반야바라밀을 얻어야 그 다음에나 접근이 가능하다는 논리입니다. 사법고시로 치면 일차시험 에 해당되는 단계가 곧  반야바라밀의 터득이지요.

쉽게 말씀드리자면 신령의 지혜를 몸소 익히려면 최소한 반야의 지혜라 할 바라밀 수행을 거쳐서 얻어지는 인간지혜의 최고봉을

갖춰야 한다는 식의 단계적 접근법이 필요한 셈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반야심경에는  "...구경열반 삼세제불 반야마라밀고 아뇩다라삼먁사보리" 라고 나옵니다. 

반야바라밀을 통해서 아뇩다라삼약삼보리를 얻게 된다는 뜻인데, 이 두가지 지혜를 똑같은 것으로 보는 분들이 많아서 다소  걱정됩니다.

(西山)